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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선생의 인도로 정착한 한인들 열흘 밤새 대한인국민회 총회 열어

미국---(유학타임즈 기획)--오렌지 하나를 따더라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동쪽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 30여 분 달려가면 만나는 자그마한 도시가 있다. 구한말에는 하변(河邊)이라 지칭했다는 리버사이드(Riverside)이다. 20세기 초에는 미국 서부의 대표적 부촌으로 꼽힌 곳이다. 온화한 겨울 기후 덕에 오렌지 농장이 번성해 오렌지의 수도로 불리기도 했다. 리버사이드 코티지 스트리트 3096번지. 한적한 주택가 속으로 한참 들어가면 철로와 맞닿는 막다른 지점이 보인다. 철로와 나란히 뻗은 소로에는 커머스 스트리트라는 표지판이 붙었는데, 과거엔 파차파 애비뉴였다고 한다. 고개를 돌리면 철로 반대편 철망 사이로 가스 저장소와 충전 시설이 보인다. 이 일대 부지를 남가주 가스회사 소칼(Socal)이 사들인 것이다. 철로와 철망 탓에 왠지 삭막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이곳이 바로 ‘도산공화국’이자, 미국 내 한인타운의 효시인 ‘파차파(Pachappa)’ 캠프다.

철로를 따라 시선을 쭉 옮기면 한인들이 올라다녔다는 민둥산 모양의 동산도 보인다. 파차파 캠프의 존재가 알려진 건 뉴욕 산본보험회사에서 제작한 1908년 지도에 이곳을 한인거주지역으로 표시해둔 것이 단서가 됐다. 조국의 현대적 교육을 꿈꾸며 미국으로 향한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은 1902년 10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후 1904년 3월 가족과 함께 남 캘리포니아에 해당하는 리버사이드로 내려왔다. 그리고 도중에 귀국한 기간이 있기는 하지만 1913년까지 거주한 기록이 남아있다. 도산이 세운 공립협회, 신민회, 대한인국민회가 본부를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에 둬서 알려지지 않은 것일 뿐, 초기 미주 한인사회에서 독립운동의 터를 닦은 곳이 바로 리버사이드였다. 신한민보·공립신보 등에는 ‘총회장 안창호 씨가 각 지방을 순찰하며, 리버사이드에는 회원의 수효가 60인에 달하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미주 한인 이민사를 오래도록 연구해온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학(UC리버사이드) 장태한 교수에 따르면 리버사이드에는 1910년대 초반 오렌지 수확기에는 최대 300명 안팎의 한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엔 철로 옆 판자촌 가옥으로 시작됐다. 1911년 이곳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가 열렸다. 총회는 열흘 밤낮을 새고 새벽 3시에야 끝났다고 전해진다. 당시로선 상상하기조차 힘든 민주주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것이라고 장 교수는 설명했다.

“오렌지 하나를 따더라도 애국의 마음을 잊지 말라”

당시 신한민보는 리버사이드 총회 분위기에 대해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우리는 생명을 한배에 실어놓고 만경창파에 길을 찾아 기관을 운전함에 두려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대의원의 고심 경영이 어떠하였겠는가’라고 애절하게 묘사했다. 파차파 캠프에 한인들이 정착하고, 민주적 결사체를 표방한 대한인국민회 조직에 의연금이 조금씩 쌓이면서, 이것이 훗날 임시정부의 귀중한 기금이 됐다고 한다.

도산은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 성실한 한인들을 보내 백인 농장주의 신임을 얻게 한 뒤 정착을 도왔다. 오렌지 하나를 따더라도 애국의 마음을 잊지 않도록 계몽하던 시절이다. 안창호 선생과 공립협회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버사이드로 넘어오는 한인들에게 “정직하게 오렌지를 수확하라”는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공립협회는 한인노동국을 개설해 조직적으로 취업을 도왔다.

리버사이드 시는 2017년 3월 파차파 캠프를 문화관심지(사적지)로 지정해 현판을 설치했다. 현판에는 “이곳은 코리아타운의 효시이다. 당시 주소는 1532 파차파 애비뉴인데… 도산공화국으로도 알려진 이곳에 한인 100여 명이 모여 20여 채의 가옥으로 판자촌을 형성했으며…”라는 설명과 ‘1호’(No.1)라는 숫자, ‘1905∼1918’이라는 연대 표기가 차례로 새겨졌다.

파차파 캠프는 미혼 남성 중심이던 다른 한인 거주지와 달리 가족중심의 공동체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비록 전기·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열악한 주거형태였지만 초기 독립운동의 싹을 틔우던 소중한 터전이었다.

“파차파 캠프… 미주 독립운동의 메카로 다시 조명되어야”

한인들은 낮에는 오렌지를 따고 밤에는 영어를 배우고 일요일에는 예배를 봤다고 한다. 도박과 폭음을 금하는 엄격한 규율, 자치규약도 있었다. 도산은 “무엇보다 몸을 바치고 피를 흘릴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 아래에서 단합된 단체를 설립하고 교육을 하고 자본을 모아야 한다”고 한인 동포들에게 역설했다.

파차파 캠프의 한인들은 이런 지침대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교육을 하며 실업회사를 설립해 자본을 축적했다. 파차파를 도산공화국이라 부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파차파 캠프에 이어 리버사이드 다운타운 역(驛). 리버사이드에서 한인들이 두 번째로 이주한 곳이라고 장 교수는 설명했다. 여기도 파차파와 마찬가지로 삭막한 철로 주변이다. 당시 한인들은 기차 소음 때문에 현지 주민들이 기피하던 지역에서야 어렵사리 정착할 수 있었다. 그만큼 고단한 타지에서의 삶을 개척한 것이다. 리버사이드 다운타운 역은 현재 LA 메트로폴리탄 지역으로 향하는 통근열차가 다닌다.

리버사이드는 1913년 한파로 오렌지 작황이 큰 타격을 받았고 그 이후 한인들도 하나둘 떠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산은 두 번째 미국 거주 시기인 1911년부터 1918년까지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을 중심으로 가장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뿌리를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장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 즉 도산공화국은 안창호 선생의 미주 생활과 활동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최초의 한인타운이자 미주 독립운동의 메카로 다시금 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처: 재외동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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